1986년 1월 8 IOC 중재 남북체육회담 2차회담 후 진행된 사마란치 위원장 기자회견. 통일부 제공
통일부가 13일 공개한 1984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의 남북회담 문서는 최대 4종류의 남북회담이 동시다발로 진행된 1980년대 중·후반 남북 대화의 현장 기록을 담았다.
특히 스위스 로잔에서는 남북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간의 88서울올림픽 공동개최안을 논의하는 체육회담이 진행됏는데 남북 간 개최종목 배정을 둘러싼 내막이 담겼다.
또 남북 간 체제경쟁이 한창인 시기답게 여러 회담에서 경제력을 과시하는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 "88올림픽 양궁 北개최 IOC제안은 전두환 결정따른 것"
남북한과 IOC는 88서울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를 논의하는 체육회담을 IOC본부가 있는 로잔에서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총 네 차례 진행했다.
북한이 남측의 올림픽 단독 개최가 '2개 조선'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반발하며 공동 개최를 주장하자 IOC 중재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회담에선 어떤 종목을 북한에서 개최하느냐가 쟁점이었는데, IOC가 탁구와 양궁의 북한 개최를 중재안으로 제시하자 한국이 이에 반발하는 모습이 나온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3차 회의(1986.6.10∼11) 남측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번 본인의 서울 체류 시 한국 대통령과의 오랜 대담을 통해서 들은 바는 한국 측에서 IOC를 통해 2개의 경기종목, 즉 탁구와 양궁을 북한 측에 배정한다는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뜻에 따라 두 종목의 북한 배정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종하 한국 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은 "우리나라 VIP(전두환 대통령)와 만나셨을 때 양궁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저도 들은 바 있다"면서도 "그 후 우리 공식기구 KOC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을 때 양궁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 결론이었다"고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사마란치 위원장은 전 대통령과 두 차례 면담을 거쳐 나온 종목 배분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탁구와 양궁 전 경기, 축구 예선 1개조 경기, 사이클 단체 도로경기의 북한 출발 등을 북측에 배정하는 최종 중재안을 제시했다.
KOC는 한국의 메달 유망 종목인 양궁 대신 펜싱을 북한 배정 종목으로 내놓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표현했지만 IOC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당시 전 대통령의 결정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양궁 종목의 북한 개최가 포함된 중재안을 고집했다는 점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북한은 IOC 중재안이 공동 개최 수준에 못 미친다며 거부해 서울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이 각국 선수단과 취재진 등의 남북 자유 왕래 조건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당시 IOC와 국제사회의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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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15일 남북고위급회담 4차 예비회담 전 악수하는 남북 대표단. 통일부 제공
◇ 北회담장 정전에 南 "우린 풍부한데", 北 "옛날에도 南에 보내준다 했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도 문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1차 남북경제회담(1984.11.15)에서 북측 대표는 "농업·공업분야 할 것 없이 아주 좋다"며 "농촌 역시 몇 년 전에 950만∼960만t 알곡을 생산했는데, 금년도에는 그보다 훨씬 넘어설 것으로 예견한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의 연간 곡물 생산량이 500만t 수준임을 고려하면 이는 체제 경쟁을 의식한 과장된 주장이라고 통일부는 평가했다.
남측도 북한을 의식하는 모습이 빈번한데 남북고위급회담 7차 예비회담(1990.7.3)에서 남측 대표는 회의 장소인 '평화의 집' 신축을 소개하면서 "3층에 한 750평 정도가 된다"며 "더 크게 지을 수도 있는데 귀측의 통일각하고 비슷하게 짓는 게 좋겠다 해서 요 정도로 지었다"고 말했다.
1989년 3월 판문점 북측 시설인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2차 예비회담에서 정전으로 회의가 중단되자 남측 대표는 "전력이 좀 어려우신가요? 우리는 요즘 전기가 상당히 풍부한데, 그런 측면에서도 우리가 빨리 남북교류도 많이 확대해 가야"라고 말했다.
이에 북측 대표는 "전력은 우리가 옛날에도 남측에 보내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전력이야 뭐 우리 쪽만큼 하는 데 있습니까"라고 쏘아붙였다.
당시 정전 상황이 10분 이상 지속된 것을 두고 1990년대를 앞두고 북한에서 경제난이 심화하는 징후가 나타난 것이라고 통일부는 분석했다.
1980년대 중·후반은 한 해에 최대 4가지 종류의 남북회담이 동시에 진행돼 남북 간 화해무드가 조성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등을 이유로 회담을 중단하는 행태를 반복했고, 남측 역시 회담에 특별히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김웅희 전 남북회담본부 본부장은 "북한은 아웅산 테러 이후 테러국 비판과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려고 대남 수재 지원에 나서고 남북 대화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연출했지만 남한은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대화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며 "대부분 '회담을 위한 회담'으로 흘렀다"고 회고했다.
한편 남북고위급회담 7차 예비회담(1990.7.3)에서는 북한이 항공편을 이용한 대표단 왕래를 제안했다. 남측도 "대단히 전환적 발전"이라며 반겼고 회담 합의문에도 반영됐지만 우리 군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김웅희 전 본부장은 "북한 대표단이 비행기로 방남하면 우리 군사시설이 노출되고 촬영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군은 남북 항공기 왕래에 부정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남북 항공편 왕래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야 실현됐다. 군사적 우려를 고려해 서해를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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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23일 남북국회회담 예비회담 1차 접촉 후 기자회견. 통일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