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포스트=김태연 기자] 한국과 필리핀 정상이 최근 정상회담에서 2016년 한인 사업가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 피살 사건을 정식 의제로 논의하면서 역대 정부가 풀지 못한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8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종신형 선고 이후 도주한 주범의 형 집행 등을 위해 공조하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한 후속 조치를 살피고 있다.
◇ 文정부 정상회담서 원론적 언급…尹대통령은 "주범 체포 공조"
박근혜 정부는 지씨 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방한한 살바도르 파넬로 필리핀 대통령실 법무수석(장관급)을 접견하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 등을 요구했다.
파넬로 수석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의 사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철저한 수사로 범인을 엄중히 처벌하고 유족 측 바람대로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이 마닐라를 방문하고, 이듬해 6월 답방 형태로 두테르테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양국 정상이 지씨 사건을 언급하며 필리핀 내 한국민 안전을 위해 협력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제8차 한-필 정책협의회(2023년 2월), 한-필리핀 외교장관회담(2023년 7월), 한-필 외교장관회담(2024년 8월) 등에서 지씨 사건의 신속한 사법절차 진행 등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주범이 종신형을 선고받고 형 집행 전 기간을 틈타 도주한 사실이 올해 9월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자 정상회담에서 이례적으로 주범 체포 공조 등의 내용까지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 국회 외통위 국정감사서도 이슈…의회 차원 대응책 검토
주범 도주와 양국 사법공조 부실 등을 지적하는 연합뉴스의 단독 보도 이후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이 뒤늦게 사실관계 파악에 나서는 등 늑장 대응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쟁점이 됐다.
외통위 야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과 한정애 의원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외교 당국이 재외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랐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회가 양국 의회 간 외교 채널로 정상회담 합의 이행을 위한 필리핀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양국 간 국민 안전 보장에 관한 협정 체결이 한 건도 없다는 것은 놀랍다"며 "필리핀 의회의 협력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요청하고,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정부나 재외공관에서 재외국민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중요성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며 "상대국과의 관계에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국회 차원에서 협조 요청도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 주범 체포는 당국 의지 관건…"양국 안전 각서 체결 필요"
지씨 피살 사건에 가담한 필리핀 전현직 경찰관 3명 중 공범 2명은 1·2심에서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주범인 전직 필리핀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 라파엘 둠라오는 1심에서 무죄였다가 올해 6월 2심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넉 달 넘게 행방이 묘연하다.
정민재 한필법무법인컨설팅 대표는 "필리핀 경찰청(PNP) 최고위 간부 등과의 연루 의혹이 있었던 사건이라 당국은 계속 부각되는 걸 꺼린다"라며 "당국의 적극적인 의지만 있으면 전격적으로 체포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필리핀 출신 전직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한국문화다양성기구 이사장은 "한-필리핀 수교 75주년을 맞아 양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각서를 처음으로 체결하는 등 시스템을 만들 필요도 있다"고 제언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은 "신속한 대법원 재판 진행을 위해 주재국 사법당국뿐만 아니라 고위급 인사 면담 시 지속해서 관심과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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